3일동안 안보기

투데이존 - 세상의 모든 프리서버 | 리니지 메이플 던파 바람 뮤 프리서버 홍보

커뮤니티

토토베이 - 스포츠분석의 새로운 기준

유머 조선 최고의 타짜 파락호

페이지 정보

profile_image
작성자 마산구장알바
댓글 0건 조회 9회 작성일 25-07-29 13:17

본문

a571a8da93e10690eb65a5aea0a2ae8b.png
d68871ea2e34541dadf0852de49361c8.png
72d4b943638e7a214ef9eef3e0d6f618.png
39e19f2bae235b332a1fb4df44e78688.png
b24dd0501590ebca05079218b9eecfe6.png
05efa1438cba57449f056e220d472473.png
48a3f98409a42a0a57349a48ece7b7fd.png
7cd08a376602982f313814e54ffbd819.png
cf555f53f29346d232200b67e3cd5c72.png
f731b4876ffde31b7025ddf6f8ad9b06.png
fc855260d572567203b3bd26c96be645.png
e1e82c181e28580c0c62bd8ae6b7e612.png
177146125b30359db25e01397725fdc2.png
c0c2c183291fd19bf61c673d12fcf998.png
75b230c201c4dc2056ab2124717af862.png
42211dee856851d5c0135928ac2c8d32.png
f47e8fa637990c8e9643efe81b33a65b.png
57dc36eb83bc895cdf77ef04cffce86d.png
5d032e6bd17e50a58381b97a06a497ba.png
af34ec4a5dc23c7eb3fdbaa25c6f1080.png
bcbef787911b4a21efaef88812f0e547.png
c12f7ef6df09c4c9b1c282de8adb0757.png
318f6164468d7c8a043bddb4ad843410.png
13ee819a247dc4d3086e286488723630.png
fd210d0e2c467cfdf002423a9bc48848.png
56974c53cfa1334cdda5b2fd23a0b7dd.png

김용환은 일제강점기에 경상북도 안동시에 현재 시가 200억원이 넘는 저택과 논밭을 가진 큰 부자였으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온갖 노름판을 전전하며 전 재산을 노름으로 날린 것처럼 행세했다. 실제로는 그 돈을 만주에 보내 독립운동 자금으로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1995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가문에 먹칠하는 장손이 나왔다"

'파락호(破落戶)'. 재산이나 세력이 있는 가문의 자손으로서 집안의 재산을 몽땅 털어먹는 난봉꾼을 뜻하는 말로, 다른 말로는 '팔난봉'이라고도 했다. 일제 식민지 시절, 안동에서 노름꾼으로 이름을 날리던 김용환은 조선에서도 몇 손가락 안에 꼽을 만한 파락호였다. 노름을 어찌나 좋아했는지 도박하느라 아내가 아이를 낳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땅 700마지기를 노름으로 날리고, 아내 손을 잡으며 "이제 달라지겠다"고 굳게 약속했지만, 다음날 집에 있는 땅문서를 들고 투전판으로 달려간 인물이었다.

김용환은 경상북도 안동 일대에서 알아주는 명문가였던 의성 김씨 종가의 장손이자, 조선시대 학자이자 지휘관이었던 학봉 김성일의 13대손이었다. 학봉 집안은 대쪽 같다는 말이 딱 어울리는 선비 집안이었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였던 학봉은 임진왜란 때 관군을 이끌며 의병을 지원하다가 진주성에서 병사했다.

그렇게 지켜온 가문의 명예가 김용환으로 인해 한순간에 추락했다. 오래도록 쌓아온 집안 재산도 모두 날아갔고 수백 년 동안 대대로 물려내려오던 전답 18만 평도 노름빚으로 인해 모두 팔렸다. 현재 시가로 약 200억 원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나중에는 사당 신주까지 팔아치우려는 것을 문중 사람들이 뜯어말렸다. 문중 자손들은 십시일반 돈을 걷어 김용환이 팔아먹은 전답을 다시 종가에 사주곤 했다.

집안 재산을 거덜낸 것으로도 모자라 그는 친정집에 가서 장롱을 사오라고 시댁에서 딸에게 준 돈마저도 가로채 노름으로 탕진했다. 딸은 할머니가 쓰던 헌 장롱을 가지고 울면서 시댁으로 향했다. 사람들은 헌 장롱이 귀신 들린 장롱이라고 해서 강변 모래밭으로 가져가 부수고 불태우기까지 했다.

동네 사람들은 김용환에 대해 수군거리고 비난했고, '도박에 빠지면 김용환 처럼된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였다.

(윤학준은 <양반 동네 소동기>라는 책에서 우리나라 근대 3대 파락호를 손꼽았는데,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1930년대 형평사운동 투사였던 김남수, 그리고 김용환이 그들이었다.)

쓸쓸한 죽음 뒤 밝혀진 진실,

독립을 위해 싸운 혈기

김용환은 해방 다음 해인 1946년 4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이후, 세월이 흘러 집안을 망신시킨 난봉꾼의 정체가 드러났다. 그가 탕진했다고 알려진 돈은 모두 만주 독립군에게 독립자금으로 보내졌고, 그는 일제의 눈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를 노름꾼으로 철저하게 위장한 독립운동가였다.

김용환이 자신의 정체를 숨겨가며 독립운동을 하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릴 적 그는 할아버지 김흥락이 왜경 앞에서 무릎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현장을 보게 됐다. 왜경은 사촌인 의병대장 김회락을 숨겨줬다면서 할아버지를 사정없이 다그쳤다. 어린 김용환은 그 장면을 보고 독립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한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의병 활동을 시작했다. 경상북도 북부 지역의 핵심 지도자로서 안동 지방의 의병을 이끌었던 서산 김흥락의 손자답게 문경 등지에서 활약한 이강년, 김상태가 이끄는 의병 부대에 참가했다.

30대에는 만주 망명길에 올라 군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단체인 의용단의 서기로 활약했다. 의용단은 만주 길림의 군사조직인 길림군정서에 독립운동자금 지원을 위해 영남 지방 인사들이 결성한 조직체였다. 의용단은 주로 경상도 지역인 안동, 영천, 군위, 창녕 등지의 부호를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해왔는데, 대다수의 부호들은 친일파였기 때문에 큰 효과는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김용환은 1922년 일본 경찰에 발각돼 옥고를 치렀다.

독립운동 자금 마련에 일생을 바쳤다

이후 그가 살아갈 방법은 철저한 위장밖에 없었다. 대를 이어 내려오던 막대한 재산을 도박으로 탕진한 것으로 위장한 뒤, 모인 돈을 모두 만주 독립운동자금으로 보냈다. 요즘으로 치면 100억 원이 넘는 액수였다. 이런 활동은 가족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일제의 눈을 피해 독립군 군자금을 대려고 철저히 노름꾼 노릇을 했던 김용환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해 평생 주색잡기, 파락호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썼다. 임종 무렵에 사실을 이야기하자던 독립군 동지에게 그는 "선비로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인데 이야기할 필요없다"며 끝내 입을 다문 채 세상을 떠났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회원 로그인

포인트랭킹

1 꼬맹 334,500점
2 엄지 333,000점
3 짤뚱 305,500점
4 쫄뚱 291,000점
5 야호 286,500점
6 로마서버com 215,200점
7 만복서버 213,800점
8 계백이다 201,100점
9 토글왕 195,100점
10 홍보왕 187,300점

접속자집계

오늘
1,479
어제
2,478
최대
14,558
현재 접속자 수
22